발라지가 국가를 만든 유령섬


2022년 7월 4일, 발라지 스리니바산은 책 한 권을 공개했다. 미국 독립기념일을 택한 건 의도적이었다. 제목은 <The Network State>. 핵심 주장은 단순하지만 급진적이었다. 국가는 영토에서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 온라인에서 먼저 뭉치고, 공유된 가치관과 경제 시스템을 만든 뒤에 물리적 공간을 얻는다. 외교적 승인은 맨 나중에 온다. 그는 이것을 신국가 건설의 새로운 순서라고 불렀다. 1776년의 독립선언처럼 총성으로 시작하는 국가가 아니라, 비트코인 제네시스 블록처럼 코드 한 줄로 시작하는 국가. "Network State"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하나의 선전포고였다. 국가라는 말을 빌려 쓴다는 건, 동등한 무게감으로 세계와 마주하겠다는 선언이니까.


발라지는 이 아이디어를 오래 품어온 사람이었다. 스탠퍼드 박사 출신에 a16z 제너럴 파트너, 코인베이스 CTO까지 지낸 그는 실리콘밸리의 정통 코스를 밟으면서도 항상 기존 시스템의 바깥을 응시했다. 철학자처럼 깊고, 엔지니어처럼 구체적이며, 창업가처럼 실행 가능한 방식으로 말하는 사람. 내가 2015년부터 팔로잉해온 실리콘밸리의 몇 안 되는 사상가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책을 쓴다고 했을 때, 내용이 무엇일지 이미 짐작이 됐다.


책이 나왔을 때 많은 사람이 아이디어 자체는 흥미롭다고 했다. 그런데 발라지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역사가 증명해온 것이 있다. 국가는 언제나 먼저 상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유대인들은 토라를 공유 코드 삼아 2천 년간 분산 네트워크로 살았다. 회당은 어디에나 있었고, 이스라엘 건국은 그 긴 여정의 끝에서야 왔다. 초기 기독교도 마찬가지였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300년 전부터 그들은 이미 로마제국 안의 평행 국가로 작동하고 있었다. 먼저 공동체가 있었고, 땅은 나중에 따라왔다. 발라지는 완전히 새로운 걸 발명하려는 게 아니라 오래된 방식을 디지털 언어로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를 디지털 영토를 기반으로 포크하는 개념.


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Eastpoint 컨퍼런스와 Korea Blockchain Week 무대에서, 네트워크 스테이츠를 사례로 들며 이 흐름을 얘기했다. 국적이라는 개념이 선천적인 것에서 후천적인 멤버십으로 바뀌고 있다고. 국가는 더 이상 물리적 영토만으로 정의되지 않으며, 주권의 무게중심도 군사력이나 경제 규모 같은 하드파워에서 커뮤니티와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소프트파워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발라지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 않아도, 이 흐름은 크립토 생태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10여 년간 온몸으로 감지하고 있을 것이다.


실험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2023년 봄, 몬테네그로 아드리아해 해안에 작은 마을 하나가 생겼다. 이름은 Zuzalu. 발라지가 직접 운영한 팝업 빌리지로, 참가자는 약 200명이었고 기간은 두 달이었다. 크립토 개발자, 철학자, 합성생물학자, 롱지비티 연구자들이 한 공간에 모였고, 비탈릭 부테린도 그 자리에 있었다. Zuzalu는 국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국가처럼 작동했다. 공동 규칙이 있었고, 자체 패스포트가 있었고, 경제적 기여가 있었다. 중세 피렌체가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피난처이자 발화점이었듯, Zuzalu는 디지털 노마드들의 창조적 실험실이었다.


이후 비슷한 실험들이 잇따랐다. Edge City는 Zuzalu 형식을 이어받아 여러 도시에서 팝업 빌리지를 운영했고, 온두라스의 Próspera는 한층 긴 호흡의 실험이다. 2020년부터 특별경제구역으로 운영되며 자체 법률 체계와 세금 시스템을 갖춰가고 있는 Próspera에는 크립토 투자자들이 자금을 댔고, 실제 주민이 생겼다. 국가 안에 또 다른 국가가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중세 한자동맹이 영토 없이 경제 네트워크만으로 유럽을 움직였던 것처럼. 다만 한자동맹은 근대 국가의 등장으로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네트워크 국가가 맞닥뜨릴 위기의 그림자도 이미 그 안에 어른거린다.


재작년 발라지는 섬을 샀다고 발표했다. 2024년 8월, 그는 트위터에 "비트코인의 힘으로, 우리는 이제 싱가포르 인근의 아름다운 섬을 갖게 됐다"고 쓴 것이다. Network School이라는 이름. Zuzalu의 팝업 빌리지가 섬으로 무대를 바꿨다.


그런데 그 섬의 정체가 흥미롭다. 발라지가 선택한 곳은 싱가포르 맞은편 말레이시아 조호르주의 Forest City였다. 중국 부동산 재벌 Country Garden이 일대일로의 일환으로 조호르 해협의 바다를 메워 조성한 인공섬 도시로, 원래 70만 명을 수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팬데믹과 중국 부동산 위기가 겹치며 계획이 무너졌고, 전체 개발 면적의 15%만 완공된 채 입주율 1%의 유령도시가 됐다. 발라지는 바로 그 폐허 위에 Network School을 열었다. 정화된 유토피아가 아니라, 실패한 제국의 잔해 위에서 시작한 실험. 섬은 오래도록 유배지이자 이상향의 두 얼굴을 동시에 가져왔다. 자발적 유배자이자 새로운 중심의 개척자.


싱가포르 바로 옆이라는 입지는 전략이다. 자본이득세가 없고, 디지털 자산 규정이 명확하며, 아시아 금융의 허브인 싱가포르에서 셔틀로 한 시간 거리. Próspera가 온두라스의 특별경제구역법을 영리하게 이용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다만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자유와 탈중앙화를 외치면서 가장 안정된 국가 권력의 그림자 아래 자리를 잡는 행위. 경계를 긋는다는 건 언제나 동시에 배제의 행위이기도 하다.


200명이라는 숫자도 예사롭지 않다. 비공식 신뢰만으로 공동체가 굴러가는 상한선으로 알려진 던바의 수 150을 살짝 넘는 수치다. 규칙과 역할이 필요해지는 임계값, 즉 공동체가 제도를 요청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실험이 실패하더라도 그 90일을 함께 보낸 200명은 평생 서로를 알게 된다. 설령 섬이 가라앉아도, 네트워크는 남는다.


역사에 비슷한 시도들은 많았다. 오웬의 New Harmony도 있었고, 이스라엘의 키부츠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실패했다. 내부 권력 갈등, 자원 고갈, 이념 충돌이 이유였다. 자유로운 네트워크가 제도가 되는 순간 다시 국가를 닮아가기 시작하고, 리좀은 결국 뿌리를 내린다. 모든 혁명은 성공하는 순간 보수가 된다. Network School이 성공할수록 창립자의 비전이 헌법이 되고, 이견자는 이단이 된다.


나는 이 실험이 실패할 확률보다 성공했을 때 무엇이 되느냐에 관심이 크다. 90일. 한 국가가 태어나기엔 찰나에 불과하지만, 새로운 문명의 제네시스 블록을 구워내기엔 충분히 뜨거운 시간이다. 그 섬에서 발효된 200개의 세계관이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갈 때, 세상은 두 번 다시 이전의 문법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떠도는 클라우드의 사상들이 마침내 바다 위에 단단한 닻을 내렸다.


이번 주, 해시드의 싱가포르 파트너 라이언과 포트폴리오사의 다니엘이 현지에서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두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Network School 곳곳을 보여줬다. 바이브 넘치는 빌더들의 공간에서 그 낯선 활기가 느껴졌다. 그들과 함께 유령도시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올여름, 해시드 바이브 랩스의 싱가포르 에디션을 바로 이 Network School과의 콜라보레이션으로 개최할 예정이다. 곧 우리도 그 실험의 일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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