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을 살면, 무엇 때문에 죽을까
명상을 깊게 연구하는 분들과 저녁 자리가 있었다. 저명한 명상 지도자와 주지 스님, 대학병원 정신과 의사 선생님, 큰 기업의 회장님 다양한 분들과 등과 함께한 자리였다. 이런저런 주제가 맴돌다 다니엘 카너먼의 이야기가 등장했다.
다니엘 카너먼은 1934년 텔아비브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를 나치 점령 하의 프랑스에서 보냈다. 유대인이었고, 살아남았다. 그 생존의 경험이 그를 심리학자로 만들었다고 그는 말한 적이 있다. 인간이 왜 그토록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지, 그 질문이 그의 일생을 지배했다. 평생의 동료 아모스 트버스키와 함께 인지 편향과 휴리스틱을 연구했고,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경제학자가 아닌 심리학자가 경제학상을 받는 일은 전례가 없었다. "생각에 관한 생각"은 400만 부 넘게 팔렸고, 그의 이름은 학계를 넘어 경영과 정책과 일상 언어 속에 스며들었다. 빠른 사고와 느린 사고, 시스템 1과 시스템 2. 그가 만든 언어들이다.
그는 오래 손실을 봤다. 평생의 지적 파트너였던 트버스키는 1996년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때 카너먼은 62세였다. 이후 그는 트버스키의 아내 바버라와 가까워졌고, 두 사람은 함께했다. 그의 아내 앤 트레이스먼은 2018년 혈관성 치매로 세상을 떠났다. 인지과학의 대가가 인지 능력을 잃어가는 것을 곁에서 지켜봤다. 그 과정이 그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고 나중에 밝혀진 편지에서 그는 썼다.
2024년 3월, 카너먼은 90번째 생일을 맞았다. 파트너 바버라와 함께 파리로 날아갔다. 딸과 그 가족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며칠 동안 파리를 걸었다. 미술관을 돌았고, 발레를 봤고, 수플레와 초콜릿 무스를 먹었다. 3월 22일 무렵부터, 그는 수십 명의 가까운 지인들에게 이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짧지 않은 편지였다. 3월 26일, 그는 가족 곁을 떠나 홀로 취리히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다음 날인 3월 27일, 그는 스위스에서 조력사망으로 생을 마쳤다.
이메일의 내용은 1년 뒤 월스트리트저널을 통해 공개됐다. 그는 이렇게 썼다. 노화의 고통과 굴욕을 불필요하게 겪고 싶지 않다고. 자신의 어머니가, 아내 앤이, 그리고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이 겪었던 그 과정을 지켜봤기 때문이라고. 치매도 없었고 투석도 필요 없었지만, 정신의 잦은 실수들과 신장 기능의 저하를 느끼고 있었다고. 그리고 덧붙였다. 많은 사람이 이것을 너무 이르다고 볼 것을 알지만, 그게 바로 자신의 의도라고. 삶이 명백히 살 가치가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면, 그 판단을 내릴 능력을 이미 잃어버린 뒤라고. 결정 이론의 대가답게, 그는 자신의 마지막 결정을 가장 정교하게 설계했다.
함께 계셨던 스님들이 조용히 말씀하셨다. 지켜본 죽음들에 대해. 어떤 분은 숨을 거두기 직전 방 안에 아무도 없는 순간을 기다린 것 같았다고 했다. 어떤 분은 오래 끌다가 마지막 순간에 평화로웠다고 했다. 죽음은 매번 달랐고, 어떤 패턴도 없었다고 했다. 다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면, 죽음 앞에서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방식으로 죽더라는 것이었다.
그 말이 마음에 걸린 채로, 나는 엉뚱한 발제를 던졌다. 조금만 더 살면 죽지 않아도 되는 미래가 오지 않을까요?
농담처럼 시작했지만, 진심이었다. 나는 머지않은 미래에 역노화 기술이 개발되고 보급되리라고 믿는다. Bryan Johnson이 자기 몸을 실험실 삼아 매일 데이터를 쌓고 있고, Altos Labs가 수십억 달러를 들여 세포 리프로그래밍을 연구하고 있다. 특별한 사고를 겪지 않는 한, 인간은 죽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그 가능성이 현실이 되는 걸 지금 세대가 목격할 수도 있다.
그랬을 때, 카너먼의 선택은 어떤 의미가 될까. 그는 90세에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더 이상 날카롭게 생각할 수 없어지기 전에, 자신이 자신이기를 포기하기 전에. 하지만 역노화가 정복된 세계에서 그 이유는 사라진다. 신체도, 정신도 되감을 수 있다면. 그러면 그 세계에서 사람들은 언제, 무엇 때문에 죽음을 택할까.
살만큼 살았기 때문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이 있다. 지금 이 말은 나이와 함께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감각이다. 몸이 느려지고, 기억이 흐릿해지고, 주변 사람들이 먼저 떠나면서. 하지만 역노화 이후엔 그 준비가 오지 않는다. 몸은 계속 30대처럼 작동한다. 천 년을 살았어도 아직 하고 싶은 것이 남아 있다면, 그 사람은 죽지 않는다. 반대로, 천 년을 살았는데 이미 모든 것을 다 해봤다면?
이게 밤새 꼬리를 물었던 질문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봤을 때, 그 다음은 무엇인가. 음식은 유한하다. 언어도 유한하다. 방문할 수 있는 장소도, 만날 수 있는 관계도, 시도해볼 수 있는 직업도 언젠가는 소진된다. 인류가 1000년 후에도 새로운 예술과 기술과 철학을 만들고 있다면, 호기심 있는 사람에게 지루함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역치다. 처음 바다를 봤을 때의 감동과, 천 번째 바다를 봤을 때의 감동은 같지 않다. 처음 누군가를 사랑했을 때와, 열두 번째로 사랑했을 때는 같지 않다. 역노화가 세포를 되감더라도, 기억은 되감을 수 없다. 당신은 여전히 바다를 천 번 본 사람이다. 그 기억의 무게가 쌓일수록, 새로운 것이 주는 경이로움의 크기는 점점 작아진다. 영원히 사는 인간이 가장 먼저 잃는 건 아마 감탄하는 능력일지 모른다.
그리고 사랑이 있다. 당신이 1000년을 사는 동안, 누군가는 세상을 떠날 것이다. 당신이 100년을 함께 산 사람이 어느 날 교통사고로 사라진다. 200년을 함께 산 사람이 미래에도 원인 모를 어떤 병으로 떠난다. 영원히 사는 사람은 이별을 무한히 반복할 것이다. 1000년을 산 사람이 죽음을 택한다면, 아마 그건 지루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잃을 것을 견디기 어려워서가 아닐까.
스님들이 말씀하셨던 것이 다시 떠오른다. 죽음 앞에서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방식으로 죽는다고. 역노화 이후에도 그 말은 유효할 것 같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끝까지 새로운 것을 찾다가 어느 날 조용히 멈출 것이다.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던 사람은 더 이상 아무도 남지 않았을 때 떠날 것이다. 카너먼처럼 자율성을 가장 소중히 여긴 사람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에 선택할 것이다.
죽음이 사라지는 미래에도, 사람들은 죽을 것이다. 다만 이유는 달라질 것이다. 지금은 죽음이 우리를 찾아오지만, 그때는 우리가 죽음을 찾아간다. 살만큼 살았다는 말의 기준이 30년에서 300년으로, 300년에서 3000년으로 늘어날 뿐이다. 카너먼이 90세에 느꼈던 것을 우리는 900세에 느낄지도 모른다. 형태는 달라지지만, 질문은 같다. 나는 지금 충분히 나인가. 이제 가도 되는가.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날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 될 것이다. 지금도, 1000년 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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