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직함들


컴퓨터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건 1613년이다. 그것은 기계의 이름이 아니었다. 직업명이었다. 수식을 계산하는 사람, 천문학자 옆에서 숫자를 검산하는 사람을 가리켰다. 요하네스 케플러도 컴퓨터를 고용했다. 앨런 튜링은 300년 뒤에 그 이름을 딴 기계를 설계하면서 이렇게 정의했다. "고정된 규칙을 따르는 인간." 기계는 처음부터 사람의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런데 지금의 AI는 더 이상 고정된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규칙을 스스로 발견하고 때로는 새로 만든다. 튜링의 정의가 완전히 뒤집히고 있다. 그렇다면 규칙을 만드는 존재가 기계가 된 시대에, 인간은 무엇으로 정의되어야 하는가.


1943년 버지니아 주 햄프턴. 랭리 연구소 서쪽 건물 2층, 창문이 한 줄로 늘어선 긴 방. 형광등 불빛이 고르고 하얗다. 나무 책상 위에 계산지가 쌓여 있고, 프리든 계산기가 덜컹거리는 소리와 연필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번갈아 들린다. 창밖으로는 체서피크 만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풀밭을 흔들고 있었다. 이 방에 있는 여성들의 공식 직함은 "컴퓨터"였다.


1935년, 랭리의 여성 컴퓨터는 다섯 명이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1946년에는 약 400명이 되었다. 대부분 흑인 여성들이었다. 웨스트 에어리어 여성들은 같은 계산을 하는 남성 동료의 절반 연봉을 받았다. 연 1,440달러. 같은 수식을, 같은 정밀도로, 같은 시간 안에 풀면서. 점심시간에도 식당이 인종별로 분리되어 건물 밖에 갈 수 없었다. 일부는 책상 앞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계산했다. 그들의 이름은 직함 뒤에 가려져 있었고, 나중에 기계의 것이 되었다.


도로시 본, 메리 잭슨, 캐서린 존슨. 이들은 연필과 계산자로 로켓의 궤도를 계산했다. 1962년, 존 글렌의 프렌드십 7 임무를 앞두고 IBM이 재진입 궤도를 계산해 두었지만, 그는 발사 전에 이렇게 말했다. "If she says the numbers are good, I'm ready to go." 그 여자가 숫자가 맞다고 하면, 나는 출발할 준비가 된 거야. 그가 말한 "she"는 캐서린 존슨이었다. 그는 기계가 아니라, 기계처럼 계산하는 사람을 믿었다.


1959년 12월, IBM 7090이 도착했다. 290만 달러짜리 기계는 문으로 들어오지 못해 문을 먼저 뜯어야 했다. 설치가 끝나자 방 한 면 전체를 차지했다. 전원이 켜지는 순간 온도가 달라졌다. 트랜지스터 수만 개가 동시에 연산하는 열기가 퍼지고, 냉각 팬이 낮고 지속적으로 윙윙거렸다. 자기테이프 릴이 돌아갈 때마다 찰칵찰칵 박자가 더해졌다. 월 임대료만 63,500달러. 랭리 여성 컴퓨터 연봉의 수십 배였다. 그 방에,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존재가 처음으로 공존했다. 사람 컴퓨터와 기계 컴퓨터. 둘 중 하나는 곧 사라질 것이었다.


도로시 본은 그것을 알았다. 도서관에 가서 D. D. 매크래컨의 FORTRAN 교재를 빌렸고, 아이들이 잠든 뒤 부엌 테이블에서 읽었다. FORTRAN. FORmula TRANslation. 수식을 언어로 번역한다는 뜻이다. 그녀가 배운 것은 계산이 아니라 번역이었다. 한 시대의 논리를 다음 시대의 문법으로 옮기는 일. 교재를 숙지한 뒤 팀원 전체에게 가르쳤다. IBM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을 때 그녀의 팀에서 해고된 사람은 없었다. 모두 프로그래머가 되었고, 그녀는 분석과 계산 부서 프로그래밍 섹션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것은 저항이 아니었다. 새롭게 등장한 도끼를 부수는 대신 도끼의 언어를 먼저 배운 것이다. 그녀의 선택은 지금도 하나의 질문으로 남는다. 배울 언어가 눈에 보였기에 가능했던 것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아도 먼저 배우러 나서는 태도가 핵심이었던가.


얼마 지나지 않아 "컴퓨터"는 기계의 이름이 되었고, 누구도 사람을 그렇게 부르지 않게 되었다. 타이프라이터도 같은 길을 걸었다. 기계가 더 빨라지자 단어는 기계 쪽으로 건너갔고, 사람은 타이피스트가 되었다가 그마저도 흐려졌다. 캘큘레이터(계산기)와 오퍼레이터(교환원)도 마찬가지였다. 언어에는 가장 유능한 존재를 향해 끊임없이 주인을 바꾸는 본성이 있다. 그렇게 이동한 단어들이 가리키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새 직함이 생길 때까지 이름 없는 시간을 살았다. 그 공백이 얼마나 길었는지는 기록에 잘 남지 않는다.


2026년 2월, Perplexity AI가 "Perplexity Computer"를 발표했다. 19개의 AI 모델을 오케스트레이션하는 시스템이다. 사용자가 목표를 말하면 세부 작업을 구성하고 각 작업에 최적의 모델을 배정한다. 인간에게서 기계로 건너간 단어가 400년 만에, 기계들의 두뇌를 지휘하는 기계라는 형태로 돌아왔다. 그것은 도로시 본이 팀을 지휘하던 방식과 닮았다. 누가 어떤 작업에 강한지 알고, 들어온 일을 그에 맞게 배정하는 것. 60년의 시차를 두고 형태만 바뀌었다.


얼마 전 샘 올트먼은 "AGI는 이미 슝 하고 지나갔다"고 했고, 다리오 아모데이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했다. 둘은 같은 기술을 만들고 같은 벤치마크를 보지만, AGI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완전히 다른 언어를 쓴다. 헤겔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날갯짓을 시작한다고 말했다. 시대의 진실은 그 시대가 끝나갈 때에야 보인다. 두 사람의 엇갈린 시선은 우리가 안개 속에 있다는 증거다. 그 안개를 밖에서 보면 선명한 경계선이겠지만, 안에서는 그냥 오늘의 공기다.


도로시 본이 FORTRAN 교재를 펼치던 밤도 그랬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인간 컴퓨터 시대의 마지막"이라는 서사 속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다음 달에도 팀이 일할 수 있어야 했다. 역사적 전환점은 그 안에서는 그냥 오늘 해야 할 일이다.


오늘날의 AI는 인간의 근육이 아닌, 동사를 흡수하고 있다. 쓰다, 그리다, 분석하다. 동사를 잃은 자에게는 직함이 주어지지 않는다. 번역하다를 잃은 사람은 번역가도 잃고, 진단하다를 잃으면 진단사가 흔들린다. 동사가 먼저 이동하고, 명사가 뒤따른다.


Klarna는 2024년 고객 지원 직원 700명을 AI로 대체했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라는 직함은 등장한 지 2년도 안 되어 시들고 있다. 1940년대에는 직함이 사라지면 다른 직함이 생겼다. 그 간격이 몇 년이든 채워졌다. 이번에는 그 자리에 이름이 붙지 않고 있다. 새 직함이 생기는 속도보다 사라지는 속도가 빠른 건지, 아니면 이번에는 처음부터 채울 자리 자체가 없는 건지, 아직 알 수 없다. 이전 기술 혁명은 근육을 빼앗고 새 도구를 주었다. 지금의 기술은 인간의 언어 자체를 배우고 있다.


계산자는 박물관에 있다. 하지만 눈금을 조금씩 밀던 그 감각, 정답을 향해 손끝으로 좁혀가던 느낌은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프롬프트를 쓸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감각일지도 모른다. 도구가 바뀌어도 인간이 하는 일의 핵심은 언제나 번역이었다.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한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


"컴퓨터"라는 단어는 400년을 살았다. 사람의 직함에서 기계의 이름으로, 다시 AI 시스템의 브랜드로. 단어는 살아남았다. 그 단어가 가리키던 사람들의 직함만 사라졌다. 언젠가 AI가 인간의 언어를 완전히 습득한 뒤 스스로 새로운 직함을 만들어낸다면, 그 직함의 주인은 누구인가.


나도 매일 이 질문을 한다. 벤처투자자라는 직함.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가능성을 판단하는 일. AI가 시장 데이터를 분석하고 창업자의 패턴을 학습하고 수익률을 예측하기 시작한 지금, 이 직함도 언젠가 어떤 모델의 기능 명세서에 한 줄로 적히게 될까. 아직은 모르겠다. 다만 그 질문을 매일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다음 언어를 찾기 시작한 것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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