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닫힌 문 앞에서 기다려주지 않는다
화가 났다.
에이전트 관련 서비스를 만들면서 한국의 몇몇 서비스를 연결하고 싶어서, 국내 모 기업에 API 접근을 요청했다. 이 회사는 자기 서비스를 ChatGPT에 이미 올려놓은 상태이다. OpenAI의 창구를 가져다 쓰면서, 정작 자기네 창구를 써보겠다는 외부 요청에는 이렇게 답했다.
"현재 다른 플랫폼 기업과 논의 중이라 외부에는 열어드리기 어렵습니다."
남의 문은 드나들면서, 자기 문은 단단히 잠근다. 이 모순이 한국 테크 생태계의 현주소다.
주변 개발자 및 스타트업 대표들도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다. 국내 기업에 API 연동을 요청하면 돌아오는 답은 대부분 "비즈니스 심사 필요", "내부 검토 중", 혹은 묵묵부답이다. 이건 개별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테크 산업 전체에 깔려 있는 구조적 폐쇄성의 문제다.
숫자가 이를 보여준다. 한국 개발자 수는 266만 명으로 세계 상위권이다. 문제는 개발자 수가 아니라, 그 개발자들이 드나들 문이 없다는 것이다. MCP 생태계에는 이미 만 개 이상의 서비스가 등록되어 있는데, 한국 서비스와 연동되는 건 극소수다. GPT Store에 Zapier, Expedia, Canva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핵심 도구로 자리 잡고 있을 때, 주요 한국 기업의 이름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카카오의 사례를 보자. 기초적인 앱 개발에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연동할 수 있지만, 알림톡이나 비즈니스 채널처럼 실제로 돈이 되는 영역으로 넘어가는 순간 심사가 필요하다. 어떤 기준으로 심사하는지는 공개되어 있지 않다. 주말에 빠르게 무언가를 만들다가 이 벽에 막혀본 개발자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한국 오픈뱅킹은 2019년 전면 시행까지 수년의 논의가 필요했다. 그 사이에 미국에서는 Plaid가 금융 데이터 연동의 표준으로 자리를 잡았다. 아이러니하게도 Plaid는 은행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탄생한 회사다. 창구가 없으니 담을 넘어 들어갔고, 미국은 그 우회로를 혁신의 발판으로 뒀다. 한국에서는 그 사이 수많은 핀테크 스타트업이 규제 미로 속에서 말라죽었다.
"오픈"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고 열려 있는 건 아니다. 한국의 마이데이터 정책이 그렇다. 이름은 오픈인데, 참여하려면 라이선스가 필요하고, 라이선스를 받으려면 자본금 요건과 인력 요건과 보안 인증을 통과해야 한다. 세 명이 모여 시작한 스타트업이 접근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반면 EU는 법으로 은행 데이터를 강제 개방했고, 그 환경에서 Tink, TrueLayer 같은 금융 연동 전문 기업들이 성장했다.
결국 규제가 생태계를 죽이느냐 살리느냐는 "오픈"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다.
미국 테크의 역사는 연결의 역사다. Stripe는 몇 줄의 코드로 결제를 붙일 수 있게 만들었다. Twilio는 전화와 문자를 연결 도구로 추상화해서 연 매출 50억 달러 이상의 회사가 됐다. Salesforce가 플랫폼을 개방하자 파트너 생태계 규모가 2028년까지 2조 달러를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Shopify 위에는 만 개가 넘는 앱이 올라가 있다. 이 회사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자기 플랫폼의 가치가 외부 개발자에 의해 커진다는 걸 알았고, 그 믿음대로 행동했다.
한국의 주류는 플랫폼의 가치를 외부와 나누는 걸 위험으로 정의한다. 다양한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경쟁자가 가져다 쓸까봐, 데이터가 새어나갈까봐, 통제권을 잃을까봐. 그래서 "전략적 파트너십"이라는 이름으로 큰 회사 대표들끼리 현수막 아래에서 사진을 찍은 뒤 그들끼리만 연결하고, 나머지에게는 문을 걸어잠근다.
이 논리가 웹 시대에는 통했다. 네이버는 검색으로, 카카오는 메신저로 한국 시장을 지배했다. 성벽을 높이 쌓고 그 안에서 장사하면 됐다. 그 외 다양한 섹터에서도 비슷한 높이의 성벽들이 올라갔다.
에이전트 시대에는 게임의 법칙이 달라진다. API라는 연결 창구가 없으면 그 어떤 외부 실행도 할 수 없다. 새롭게 태어난 존재들은 사람처럼 화면을 보지 않고, 오직 API라는 레이더로만 세상을 읽는다. 아무리 예쁜 화면을 만들고 좋은 서비스를 운영해도, API 신호를 쏘지 않으면 거대한 벽으로 보인다. 웹 시대의 성벽이 경쟁자를 막는 해자였다면, 에이전트 시대의 성벽은 감옥이다. 안에서는 모든 게 완벽하게 돌아가는데, 바깥에서는 아예 보이지 않는 공간.
누군가 AI 에이전트한테 "비행기표 끊어줘"라고 말한다. 에이전트는 연결된 서비스를 탐색한다. 미국의 항공 예약 서비스, 동남아의 커머스 앱이 줄줄이 응답한다. 거의 모든 한국의 서비스는 창구 자체가 없다. 그래서 글로벌 사용자는 한국 서비스가 빠졌다는 걸 인지하지도 못한다.
역설적이지만 문을 여는 것은 더 강하고 부유한 성을 만든다. Stripe가 결제 창구를 개방하자 수십만 개발자가 그 위에 자기 서비스를 올렸고, 그 개발자들이 곧 Stripe를 지키는 방어막이 됐다. 다른 결제 도구로 갈아탔다간 수십만 개 서비스가 함께 무너진다. 닫아서 지키는 게 아니라, 열어서 지키는 것이다.
기술력의 문제라면 명확한 답이 있다. 엔지니어를 더 뽑고, 투자를 더 하면 된다. 하지만 이건 문화와 철학의 문제다. 연결을 "위험"이 아니라 "기회"로 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외부를 신뢰하지 않는 오래된 습관이다. 그 결과, 한국 스타트업은 한국 플랫폼 대신 OpenAI, AWS, Google Cloud 위에서 만든다. 한국 플랫폼은 생태계 없이 혼자 남고, 한국 스타트업은 한국 사람에게 최적화된 도구를 만들 기반을 잃는다.
에이전트 경제의 기반 인프라는 지금도 빠르게 완성되고 있다. x402와 ERC-8004가 그것이다.
x402는 '에이전트의 지갑', ERC-8004는 '에이전트의 여권'이다. x402는 AI 에이전트가 사람의 개입 없이 스스로 결제할 수 있게 해주는 표준이다. 지금까지는 AI가 어떤 서비스가 필요해도 인간이 신용카드를 꺼내야 했다. Coinbase가 2025년 5월 출시한 이 프로토콜은 같은 해 9월 Cloudflare와 공동으로 x402 재단을 설립하며 공식 인프라로 자리 잡았다. 출시 6개월 만에 1억 건 이상의 거래를 처리했고, Google, Visa, Vercel이 채택했다.
ERC-8004는 수억 개의 에이전트가 서로를 신뢰할 수 있도록 블록체인 기반의 신원과 평판 기록을 부여한다. MetaMask, 이더리움 재단, Google, Coinbase의 엔지니어들이 2025년 8월 초안을 작성했고, 2026년 1월 이더리움 메인넷에 배포됐다. 지갑과 여권이 맞물리면 에이전트들이 서로를 확인하고, 거래하고, 평판을 쌓는 경제 생태계가 완성된다.
한국의 주요 대기업 중 x402를 지원하거나 ERC-8004에 참여하는 곳은 찾기 어렵다. 해외 기업들이 에이전트 경제의 결제망과 신원 인프라를 함께 쌓는 동안, 한국 기업들은 이 흐름을 인식하고 있는지조차 불분명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에이전트 시대의 경제 지도가 그려지고 있다. 문을 닫아두는 건 경쟁자를 막는 게 아니라 그 지도에서 스스로를 지우는 것이다. 그들은 닫힌 문 앞에서 기다리지 않는다. 두드리지도 않는다. 그냥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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