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OP 팬덤은 어떻게 디지털 의회가 되었나
프로듀스101 투표조작 사건을 기억하는가. 수백만 명이 돈과 시간과 감정을 쏟아부은 투표가, 뒷방에서 숫자 몇 개 고치는 것으로 무너졌다. 사실 우리는 늘 의심하고 있었다. 대통령 선거마다 조작 루머가 돌고, 대형 오디션이 끝날 때마다 집계 방식이 도마 위에 오르는 나라에서, 누가 투표 시스템을 끝까지 믿고 있었을까. 대부분은 믿는 편이다. 다만 완벽하게는 아니다.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건 거대한 배신이 아니라 그 마지막 1%의 틈이다.
지난달 매경이 주최한 월드크립토포럼(World Crypto Forum)에서 모드하우스 백광현 부대표, 그리고 아르테미스(ARTMS) 희진과 패널 토론을 했다. 모드하우스는 4년 전 나와 정병기 대표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해시드가 벤처빌딩한 K-POP 엔터테인먼트 스타트업이다. 팬을 소비자가 아니라 의사결정 구조 안으로 들이는 실험을 하고 있다. 포럼에서 내가 가장 강조한 건 이것이었다. 블록체인을 쓴 가장 큰 이유는 기존 시스템이 가진 99%의 신뢰를 100%에 가깝게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는 것.
모드하우스는 블록체인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설립 때부터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원칙이었다. 플랫폼 앱 코스모를 쓰는 팬은 어떤 체인 위에서 돌아가는지 몰라도 된다. 보통의 서비스처럼 로그인하면 되고, 계정을 추상화한(account abstraction) 지갑이 뒤를 매끄럽게 받친다. 기술은 앞에 서지 않고 경험 뒤로 물러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접근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원하면 블록체인 탐색기에서 모든 자산과 토큰의 흐름을 직접 들여다볼 수 있다. 그래서 커뮤니티에 의심이 돌 때면 개발자 출신 팬들이 데이터를 꺼내 자발적으로 신뢰를 방어하는 장면이 벌어진다. 해명이 아니라 열람 가능한 기록이 회사를 지키는 셈이다.
중요한 투표가 열릴 때의 풍경은 더 흥미롭다. 어떤 지갑에 토큰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어느 쪽 커뮤니티가 얼마나 결집할 수 있는지, 팬들은 공개된 기록을 바탕으로 읽고 분석한다. 특정 멤버의 팬 커뮤니티끼리 작전을 짜고, 남은 표를 계산하고, 협업하며 치밀하게 결과를 만든다. 이쯤 되면 팬덤은 막연한 열정의 집합이 아니라 작은 정치 공동체다. 응원봉이 의결봉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 구조의 또 다른 핵심은 포토카드가 퍼블릭 블록체인 위에 발행된다는 점이다. 서울의 팬이 가진 카드를 지구 반대편의 팬과 곧바로 교환하거나 거래할 수 있다. 예전의 포토카드가 서랍 안에 쌓이는 수집품이었다면, 지금의 포토카드는 관계와 기억과 참여권을 싣고 국경을 넘는 디지털 자산이다.
숫자가 이를 뒷받침한다. 모드하우스의 세 팀, tripleS, ARTMS, idntt를 통해 누적 발행된 포토카드는 1,500만 개를 넘었고, 거래량은 그 두 배를 넘긴다. 글로벌 NFT 생태계 전체를 놓고 봐도 최고 수준의 활성도다. tripleS 데뷔 시즌의 일부 카드가 30배 이상의 가격에 거래된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시세가 아니라, 커뮤니티가 그 자산을 계속 쓰고 모으고 바꾸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대목에서 초기 NFT 프로젝트들의 실패가 다시 보인다. 문제는 그릇이 아니라 내용물이었다. 소속감, 참여감, 기여의 흔적, 관계의 증거. 커뮤니티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담지 못했다. 너무 많은 프로젝트가 희소성만 팔았고, 쓰일 이유를 만들지 못했다. 반면 모드하우스의 포토카드는 투표권이고, 참여권이고, 기억의 기록이고, 팬과 아티스트 사이의 관계를 저장하는 장치다. 그릇에 내용물이 차면 생태계는 살아남고, 비어 있으면 가격보다 의미가 먼저 무너진다.
투표에 쓰이는 토큰 구조도 눈여겨볼 만하다. COMO는 투기 자산으로 설계되지 않았다. 사용자의 지갑과 영구 삭제를 위한 소각 지갑에만 존재할 수 있다. 외부 시장에 흔들리는 대상이 아니라, 팬덤 안에서만 쓰이고 사라지는 연료다. 불꽃은 남지만 재는 쌓이지 않는 구조. 이 토큰은 얼마를 벌 수 있느냐보다 어디에 마음을 싣느냐를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희진의 발언도 중요했다. 모드하우스와 계약할 때 플랫폼 자체도 의미 있었지만, 더 컸던 건 정병기 대표와 다시 함께 작업한다는 신뢰였다고 했다. 이 말이 구조의 본질을 보여준다. 사람에 대한 신뢰를 없애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신뢰가 배신당하지 않도록 받치는 기술.
희진은 포토카드 거래와 투표의 모든 기록이 남는다는 점을 큰 장점으로 짚었다. 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티스트 입장에서도 팬의 선택이 정말 팬의 선택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더 흥미로운 건 이 시스템이 아티스트의 감각까지 바꾼다는 점이다. 희진은 멤버들이 더 선호했던 곡이 있었지만, 밀어붙이기보다 팬들의 선택을 믿어보자고 결정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작아 보이지만 큰 장면이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팬은 결과를 소비하는 사람이었지, 결과를 함께 만드는 사람은 아니었다. 여기서는 그 관계가 뒤집힌다. 팬이 선택의 일부가 되고, 아티스트는 그 선택을 검증된 신뢰 위에서 받아들인다.
정산 구조도 빼놓을 수 없다. 모드하우스는 디지털 포토카드 판매 수익을 바로 정산한다. 희진은 그 정산으로 어릴 때부터 해보고 싶었던 마라탕 재료를 가격 걱정 없이 담아봤다고 말했다. 이 장면이 좋은 이유는 거대한 담론이 일상의 결로 내려오기 때문이다. 블록체인, 투명한 정산 같은 말은 쉽게 추상으로 흐른다. 하지만 시스템의 진짜 가치는 사람의 삶 안에 도착해야 증명된다. 팬에게는 참여가 실감나는 구조, 아티스트에게는 수익과 신뢰가 함께 돌아오는 구조. 기술이 관계를 바꾸는 순간은 늘 이런 소소한 일상에서 들킨다.
희진은 판매량이 공개되는 것이 장점이면서 동시에 부담이라고도 했다. 투명성은 공정함을 주는 동시에 비교를 낳는다. 모드하우스가 보여주는 건 완벽한 유토피아가 아니다. 더 투명한 시스템이 더 많은 신뢰를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과 함께, 그 투명성이 사람에게 주는 압박도 감수해야 한다는 현실이다. 바로 그래서 이 실험은 진짜처럼 느껴진다. 기술이 긴장을 지워주는 것이 아니라, 더 정직한 긴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모드하우스가 흥미로운 건 블록체인의 엔터테인먼트 적용 사례라서가 아니다. 팬덤이라는 가장 감정적이고 인간적인 영역에서, 99%의 신뢰와 100%에 가까운 검증 가능성이 실제로 다른 세계를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99%의 신뢰 위에서 사람들은 참여하되 의심한다. 100%에 가까운 검증 가능성 위에서 사람들은 더 깊이 감정을 쌓는다. 의심 없는 참여는 더 강한 몰입이 되고, 더 강한 몰입은 더 단단한 커뮤니티가 된다.
결국 블록체인이 하는 일은 거창한 혁명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던 신뢰의 마지막 틈을 메우는 일이다. 그 미세한 차이가 시스템의 차원을 넘어 관계의 차원을 바꾼다.
엔터테인먼트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 위에 서 있는 산업이다. 투표를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 참여가 진짜 참여가 되는 세계. 팬의 선택이 누군가의 선의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 세계. 그런 세계에서 팬과 아티스트의 관계는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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