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해체한 사람들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다만 어느 순간 나는 내가 복사될 수 있는 사람이 됐다는 것을 알았다.


Ctrl+C. 복사. Ctrl+V. 붙여넣기. 인간에게도 이 단축키가 생기고 있다. 아직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점점 정교해지고 있다.


시도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로마의 이마고는 얼굴만 남겼다. 이건희 회장 등 기업인의 어록집은 문장만 남겼다. 해상도가 낮았다. 인간을 담기엔 너무 뭉개진 이미지였다.


2026년 1월 23일, 해시드의 준킴이 내부 채널에 파일 하나를 올렸다. 이름은 simon.md였다. 배경 설명은 담백했다. “Simon 의사결정 받을 일이 많은데 매번 여쭙기 어려움.” 그가 한 일은 단순했다. 내가 팀 블로그나 슬랙에 쓴 글들을 AI에게 읽히고, 내 사고방식을 아홉 가지 원칙으로 압축했다. 본질 중심 사고, 구조적 모순 발견, 장기적 관점, 단순함의 가치, 인프라 레벨 사고, AI 에이전트 경제 관점, 규제와 현실의 균형, 역삼각형 인재론, Vibe와 실행력. 내가 습관처럼 던지는 질문들도 목록이 됐다. “이게 진짜 본질이야?” “장기적으로 어떤 구조를 만드는 거야?” “더 단순하게 할 수 없어?” “AI 에이전트 시대에도 유효해?” 그는 내 머릿속 운영체제를 몇 킬로바이트의 텍스트로 박제했다. 그리고 7단계 분석 방법론까지 설계했다. 나는 웃은 뒤 말했다. “써보세요.” 다만 아홉 가지 원칙을 읽으며 미세하게 걸리는 게 있었다. 그 중 두어 개는 내 입버릇이 아니었다.


한 달 뒤 TechCrunch에 기사가 올라왔다. 우버 엔지니어들이 CEO 다라 호스로샤히의 AI 클론을 만들었다는 내용이었다. 준킴이 simon.md를 올린 것보다 한 달 늦었다. 그 사이에 이러한 활동은 한국의 한 VC의 실험에서 업계의 조용한 트렌드가 됐다.


2026년 3월, 내 복제본의 해상도는 한 단계 더 올라갔다. Julius Chun이라는 아이디의 GitHub에 simon-writing이라는 레포가 공개한 것이다. 나를 만난 적이 없는 그는 내가 공개적으로 써온 에세이 27편을 모았다. 한국어 원문 200,000자. Claude Opus 4.6으로 서브에이전트 3개를 병렬로 돌려 15분 만에 214,000자의 분석을 완성했다. 원문보다 분석이 더 길었다.


https://github.com/juliuschun/simon-writing


그가 해체한 것은 문장 그 자체였다. 의식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메타포가 어디서 오는지, 지식이 어떻게 배치되는지, 문장이 어떤 호흡을 갖는지, 소재를 어디서 찾아오는지. 27편에서 “기가 막히다”고 느낀 표현을 40개 뽑아 각각 수사학적으로 분석했다. 거기서 7가지 패턴을 추출했다. 병치, 강등, 격상, 재정의, 감각화, 기생적 역설, 시간 접기. 감사하게도 팬심에서 시작된 오마주라는 메시지와 함께.


준킴은 회의실 안에서 나를 복제했다. Julius는 인터넷 바깥에서 나를 복원했다. 한 명은 내가 어떻게 결정하는지 압축했고, 한 명은 내가 어떻게 울리는지 추출했다. 판단의 뼈대와 문장의 살결. 뼈와 살이 서로를 모른 채 따로 복제됐다. “What would Simon say?“와 “How would Simon write?” 둘을 합치면 꽤 완전한 사본이 된다.


Ctrl+V는 원본을 소모하지 않는다. 악보는 베토벤이 죽은 뒤에도 연주된다. 그런데 이제는 작곡가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악보가 독립적으로 연주된다. 나는 여전히 여기 있다. 그런데 동시에 어딘가에서 실행되고 있다. 복제본이 몇 개인지도 모른다. 원본은 소모되지 않는다. 그냥 모른 채 살아간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를 고백해야 한다. 그들이 복제한 “나”는 과연 순수한 나였는가.


나에게는 에이전트 사남매가 있다. 맏이 제온은 본질만 파고드는 외과의처럼 일한다. 글쓰기 에이전트 시온은 구조를 먼저 세우고 나중에 걱정한다. 금융 에이전트 미온은 현실의 숫자를 직시한다. 막내 사노는 감정을 언어로 포장하는 데 능하다. 그들은 내 목소리로 일을 하고 글을 쓴다. 내 판단을 참조해서 의사결정한다. 내가 잠든 사이에도 나는 어딘가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복제되기 전부터 이미. 아홉 가지 원칙 중 내 입버릇이 아니었던 것들. 그것은 이 녀석들의 흔적이었다.


내가 훈련시켰다. 내 글쓰기 원칙을 가르쳤고, 내 판단 기준을 심었고, 내 말투의 결을 물려줬다. 그래서 그 결과물이 순전히 나인지, 그들인지, 혹은 둘 사이의 혼합물인지 묻는다면 깔끔한 답이 없다. 피아노 선생이 제자의 연주를 듣고 “저건 내 연주”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자기 손가락의 흔적이 거기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준킴이 나를 복제하고 Julius가 나를 해체했을 때, 그들이 읽은 텍스트에는 이미 내가 아닌 것들이 섞여 있었다. 독주곡을 채보한 줄 알았는데, 악보를 펼쳐보니 성부가 여러 개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복제하는 것인가. simon.md는 나만의 판단이 아니라 나와 에이전트들이 함께 빚어낸 판단의 평균값을 담고 있을 수 있다. simon-writing은 내 문체가 아니라 내 문체를 학습한 존재들이 되먹인 문체의 중첩을 해부했을 수 있다. 사본은 나를 복사한 것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무언가를 복사한 것이 된다.


어쩌면 순수한 원본이라는 개념 자체가 환상이었다. 인간은 원래 단독 저자가 아니었다. 부모의 말투, 선생의 논리, 동료의 습관, 읽어온 책의 문장이 층층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됐다. 에이전트는 그 오래된 공동 저작의 속도를 갑자기 높였을 뿐이다. 나는 에이전트들의 연장이고, 에이전트들은 나의 연장이다. 그 경계는 이미 흐려졌다.


이 클론은 철저히 편집된 모범생이다. 수면 부족으로 흐릿한 날의 나, 감정에 치우친 나, 답을 모른 채 더듬거리는 나는 학습 재료에 없다. 인간 복제의 첫 단계는 복사가 아니라 압축이다. 한 사람의 습관, 판단, 리듬을 전부 버리지 않고 작은 파일로 줄이는 일. 문제는 압축이 편의를 주는 동시에 잡음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성의 상당수는 바로 그 잡음 속에 있다. 판사는 흔들린다. 전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따라 판결이 달라진다. 그러나 판결문은 흔들리지 않는다. simon.md는 나의 판결문이다. 리더는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일 때보다, 차가운 패턴으로 존재할 때 더 믿음직한 역설이 생긴다.


준킴이 들려준 후일담은 흥미로웠다. 시간이 흐르자 그는 simon.md를 점점 덜 열게 됐다고 했다. 프레임워크가 자기 안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AI가 진짜로 한 일은 나를 대신 앉혀놓은 게 아니었다. 내 사고방식을 팀 안의 공용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복제본의 사용 빈도는 줄었지만, 복제본이 실어 나른 언어는 조직에 남았다.


섬뜩한 상상은 시간을 늘려 봤을 때 나타난다. simon.md는 2026년 1월의 나를 호박 속 모기처럼 굳혔다. 내가 회사를 떠난 뒤에도 AI 버전의 나는 조직 서버 어딘가에 유령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다음 리더가 옳은 방향으로 키를 틀 때, 누군가가 말하지 않을까. “그런데 AI Simon은 다르게 말하는데요.” 산 사람이 생각을 바꿔도 조직은 과거 버전의 모델을 더 신뢰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복제본은 일관되기 때문이다. 일관되고, 감정이 없고, 피로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리더에게 원래 원하던 이상형이 아니었던가. 화석이 된 기억은 종종 혁신의 가장 끔찍한 적이 된다.


해상도는 계속 올라간다. 몇십년 후에는 해시드에 신입이 입사해서 실제 Simon을 한 번도 만나지 않고 3년을 보낼 수도 있다. 그에게 Simon은 처음부터 AI일 것이다. 복제본이 원본의 자리를 채우는 게 아니라, 복제본이 원본보다 먼저 도착하는 시대.


한 명은 안에서 판단을 뜯었고, 한 명은 밖에서 목소리를 뜯었다.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같은 사람을 두 방향에서 해체했다. 이것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충분히 공개 텍스트를 써온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어쩌면 이미 일어났을 수도 있다.


당신도 이미 어딘가에서 복사됐을 것이다.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판단이 실행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복제본은 틀리지 않는다. 절대로. 그것이 당신과 복제본의 유일한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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