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굴의 영어 이름을 Rabbit Crypt로 바꿨다. 엄청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Rabbit Hole은 보통명사이다보니, 늦은 밤에 차가워진 커피를 마시면서 이 공간에 어울리는 고유한 이름을 생각하다 그렇게 되었다. 세 겹의 그림자가 겹쳐 있는 이름이다.
Rabbit hole. 앨리스가 흰 토끼를 따라 미끄러져 들어간 그 구멍. 들어가기 전에는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나오고 나면 창밖 풍경의 색이 아주 미세하게 달라져 있는 것 같은 경험. 이곳에 쓰는 글은 그런 종류의 글이다. 읽기 전과 읽은 후의 세계가 같은 세계인데, 어딘가 한 뼘 정도 어긋나 있는 느낌을 주는 글.
Crypt. 지하 묘지. 성당 아래에 있지만 사람들이 잘 내려가지 않는 공간. 오래된 레코드 가게의 먼지 쌓인 구석처럼, 찾는 사람만 찾는 곳에 가장 오래된 것들이 잠들어 있다. 유행에 휩쓸린 글은 유행과 함께 사라진다. 여기에 내려놓는 글은 낡은 가죽 재킷처럼 시간이 지나도 손에 쥘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Crypto. 암호. 크립토그래피의 어원이자, 이 공간이 자주 다루게 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블록체인, AI, 기술이 만들어내는 구조적 변화. 겉으로 보이는 것 아래 숨어 있는 메커니즘. 새벽에 오래된 라디오를 켰을 때 잡히는 희미한 주파수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만 한번 잡히면 놓을 수 없는 신호들을 풀어어보고 싶다.
여기에 그런 것들이 조금씩 쌓아보려 한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의 뒷면. 웃으며 지나친 장면 속에서 아주 작게 들려오는 비명. 가격표가 붙는 순간 색이 바래는 것들.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새벽 세 시에 혼자 깨어 있을 때 떠오르는 질문. 5년 뒤에 읽으면 예언처럼 느껴지고, 지금 읽으면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문장들. 문을 닫고 나와도, 어딘가 깊은 곳에서 토끼의 발자국 소리가 희미하게 따라오는 그런 공간.
한국어로는 여전히 편하게 토끼굴이라고 불러주셔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