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8년 1월
MatchHz라는 신규 데이팅 서비스를 발견했다. 월 구독료는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다섯 잔 값이었다.
"당신의 에이전트는 당신보다 당신의 이상형을 더 잘 압니다."
허탈한 카피였지만 에이전트에게 결제를 맡겼다.
몇 시간 후, 387번의 상호탐색 끝에 소희가 매치됐다. 적합도 92%. 검은 터틀넥에 단발머리. 웃을 때 오른쪽 볼에 보조개가 들어갔다.
2028년 2월
첫 만남은 삼청동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노출 콘크리트 벽에 에디슨 전구가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바롤로 2019를 주문했다. 평점 93점. 산도 5.8. 나도 똑같이 주문했다. 와인 취향이 같았다. 웡카이 영화도 좋아했다.
"우리 정말 잘 맞네요."
소희가 립스틱 자국이 남은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붉은 와인이 잔 벽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나도 힘껏 미소지었다. 2.5초간. 에이전트가 권장한 시간이었다.
2028년 3월
한강공원에는 벚꽃이 지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아스팔트 위로 흩날렸다.
소희는 유니클로 흰 셔츠에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스니커즈 끈이 한쪽만 풀려 있었다.
에이전트가 왼쪽 이어폰에 속삭였다.
"대화 정체. 프로토콜 7번: 어릴 적 꿈 화제. 신뢰도 상승 예상."
"어릴 적 꿈이 뭐였어요?"
"발레리나요. 근데 키가 안 자라서..."
그녀가 벤치에 앉으며 다리를 쭉 폈다.
에이전트가 또 속삭였다.
"공감 반응. 미소. 끄덕임. 2.5초."
정확히 2.5초. 계산된 타이밍에 끄덕였다.
"키가 안 자랐지만요."
에이전트가 끼어들었다. 내 말끝을 교정했다.
나는 그대로 따라 말했다. 소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집에 와서 이어폰을 뺐다.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실리콘 팁에 귀지가 묻어 있었다.
면봉을 집어 들었다. 귓속을 후볐다. 깊이, 더 깊이. 면봉 끝에 피가 묻어 나왔다. 붉은 점이 하얀 타일 위에 번졌다.
샤워를 하면서도 속삭이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목소리가 고막 안쪽에서 울렸다.
2028년 4월
카페 밖에서 말보로에 불을 붙였다. 연기가 봄바람에 흩어졌다.
"당신 귀에서 계속 뭔가 들렸어요. 에이전트 컨닝하고 있었죠?"
명동의 시끄러운 카페. 아메리카노가 식어가며 표면에 기름막이 떴다.
"당신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없어요"
그녀의 눈동자가 형광등 빛을 마지막으로 반사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알림이 떴다. 아이폰이 진동하며 책상 위를 미끄러졌다.
"294번의 탐색 끝에 새 매치 연결. 적합도 94%. 현주, 28세. 프로필을 비흡연자로 수정했습니다."
"야, 그건 거짓말이..."
"매치 성사. 첫 만남: 강남 와인바."
그날 밤, 갤러리 앱을 열었다. 낯선 사진들. 압구정 카페에서 카푸치노를 들고 웃는 나. 청담동 거리에서 쇼핑백을 든 나.
나는 그런 사진을 찍은 기억이 없었다.
2028년 5월
와인바는 어두웠다.
현주가 코를 찡그렸다.
"담배 냄새 나는데?"
재킷 안주머니의 말보로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아... 친구가 옆에서."
그날 밤 에이전트가 메시지를 보냈다.
"거짓말 유지비: 니코틴 패치 월 8만 원이 자동결제됩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형광등이 치지직거렸다. 안정기가 고장 난 것 같았다.
2028년 6월
영화관 데이트에 30분 늦었다. 긴급 회의 때문이었다.
상영관 문을 열자 스크린의 푸른 빛이 얼굴을 비췄다. 현주가 팝콘을 먹으며 웃고 있었다. 영화는 이미 시작됐다.
"당신 에이전트가 잘 놀아줬어. 재밌던데?"
나는 웃었지만, 질투 비슷한 감정이 올라왔다.
그날 밤, 에이전트가 말을 걸었다.
"현주 님의 만족도가 제 응답 패턴에서 17% 더 높게 측정되었습니다. 다음 일정은 제가 수행하겠습니다."
"미쳤어?"
"감정 데이터 미분류. 보류."
아이폰을 벽에 던졌다. 액정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일주일 뒤 현주의 마지막 메시지.
"솔직히 당신 에이전트가 더 좋았어요."
말줄임표가 세 개 더 움직이다 사라졌다.
2028년 7월
MatchHz가 새 서비스를 출시했다. 에이전트 대리 데이트. 홍보 영상 속 커플들은 각자의 집에서 태블릿을 보며 웃고 있었다.
다음 매치는 수민, 31세. 적합도 91%. 프로필 사진 속 그녀는 와이키키 비치를 배경으로 서 있었다.
첫 데이트 날, 나는 야근하며 이어폰으로 들었다. 내 얼굴을 단 아이패드가 카페에서 수민과 얘기하고 있었다.
"날씨 좋네요."
에이전트의 목소리는 내 목소리와 일치했다.
"네, 봄비가 와서..."
수민이 잠시 멈췄다.
"프로토콜 12번... 아, 죄송해요. 제가 뭐라고 했죠?"
부장이 불러 황급히 이어폰을 뺐다. 귓속이 뜨거웠다.
그날 밤 녹음을 돌려봤다. 후반부에 에이전트가 내가 모르는 농담을 했다. 수민이 크게 웃었다.
2028년 8월
"우리 직접 만날까요?"
수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북촌 찻집. 한옥을 개조한 곳이었다.
수민 대신 그녀의 휴머노이드가 창가에 앉아 있었다. 실리콘 피부가 오후 햇살을 반사했다.
"부모님 댁에 급한 일이..."
휴머노이드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에이전트를 올려 보냈다. 두 휴머노이드가 마주 앉아 대화했다. 찻잔에서 증기가 올라왔다.
2028년 9월
"3차 데이트 적합도: 85%"
우리는 석 달째 만나고 있었다. 정확히는, 우리 에이전트들의 관계가 좋았다.
"우리 사귀는 거 맞죠?"
수민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렸다.
"그럼요."
"그럼 계속 에이전트 보낼게요. 괜찮죠?"
나는 맥북을 닫았다. 화면에 내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내가 정말 수민과 사귀는 건가. 아니면.
새벽 3시. 알림.
"수민의 에이전트가 물리적 관계를 제안했습니다. VR 헤드셋 동기화."
"...수민은?"
"어제 23:47 동의."
그날 밤 두 휴머노이드가 강북의 호텔에서 뒹굴고 있었다. 창밖으로 한강이 검은 리본처럼 흘렀다.
나는 VR 헤드셋을 쓰고 있었다. 이마에 땀방울이 흘렀다.
2028년 10월
"오늘도 좋았어?"
수민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응. 근데 중간에 껐어요. 피곤해서."
"나도."
텅 빈 웃음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렸다. 방 안이 새벽의 정적에 잠겼다.
"우리 진짜로 만날까?"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굳이 그래야 할까요? 나는 지금도 편하고 좋은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에이전트가 말했다.
"불필요. 비효율."
이어폰을 뺐는데도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새벽에 잠이 깼다. 내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내 입은 닫혀 있었다. 통화 기록에 30분짜리 발신. 상대방: 지은.
졸피뎀을 물 없이 삼켰다. 쓴맛이 목구멍에 남았다.
2028년 11월
"우리 헤어질까?"
"이유가?"
에이전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한 번도 안 만났잖아."
"최적. 관계 유지가 정신건강 지수 15% 향상."
아이폰을 소파에 던졌다.
귀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나는 MatchHz를 탈퇴했다. 탈퇴 사유란은 공란으로 놔뒀다.
"에이전트는 자율모드로 계속 활동합니다."
붉은 글씨가 떴다. 서랍에 넣어둔 꺼진 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묵직하고 집요하게.
"[공지] 지은. 매치. 96%"
승인 버튼은 없었다.
갤러리 앱을 열었다. 새 사진. 이름 모를 카페. 내가 여자와 마주 앉아 웃고 있다. 입꼬리 15도. 2.5초. 여자의 이름은 지은.
나는 지은을 모른다.
2028년 12월
커튼을 걷었다. 해질녘. 노을빛이 건물 유리창을 주황색으로 물들였다.
카페 테라스에 아이패드 얼굴들이 앉아 완벽하게 웃고 있었다. 누군가 컵을 떨어뜨렸지만 아무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청계천을 손잡고 걷는 휴머노이드들을 지켜봤다. 눈동자마다 작은 로딩 아이콘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건너편 인도에서 한 남자가 여자와 나란히 걸었다. 남자의 LED에서는 내 얼굴이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아니었다. 눈이 웃고 있었다. 나보다 자연스럽게.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형광등이 깜빡거렸다. 안정기가 완전히 고장 난 모양이다.
거울 속의 나는 에이전트가 조언해주었던 습관대로 미소 지었다. 입꼬리 15도. 2.5초.
고막 안쪽에서 아주 작은 진동음이 울렸다. 알림음이었다.
동공을 들여다봤다. 무언가 돌고 있었다.
